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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대기업해부 - 코리아나화장품 (1) 태동과 성장 (프라임경제)
Date 2011.07.25

프라임경제 전지현 기자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대기업 해부] 이번 회에는 코리아나화장품을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을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창업 5 만에 국내 화장품 업계 3위로 진입한 초고속 성장 기업, 2002 세계 46 화장품 기업, 국내 직판 시장의 창설 기업이자 대표기업. 창업 18년째를 맞이하는 코리아나화장품을 떠오르게 하는 수식어들이다.

라미화장품, 화장품 CEO로의 걸음

화장품 기업 코리아나의 시작에는 창업주 유상옥 회장이 서있다. 1959 대학 졸업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 35세의 나이에 임원 자리에 오른 회장은 흔히 말하는 일벌레였다. 1977 계열사 라미화장품 전문경영인이 되기까지 회사에 20년간 근무할 정도로 고지식한 회장이기도 하다.

1977 44세의 나이에 월매출 7000만원에 적자가 23억원이나 되는 계열사 라미화장품의  대표이사 부사장에 선입 되면서 화장품 업체 경영자로서의 길이 시작된다.

당시 화장품에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인사였지만 결국 그의 열정으로 적자 투성이던 라미화장품을 5년만에 흑자 회사로 일궈내는 쾌거를 이룬다.

일뿐만이 아니라 그의 욕심은 향학열에도 있었다. 입사 3년째 되던 1961 공인회계사에 합격하는가 하면 1966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지천명(知天命)에는 박사학위도 얻었다

하지만 54세가 되던 1987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당시 발생한 노사분규로 인해 위기에 내몰리게 되고 이에 책임을 10년간 몸담았던 라미화장품을 떠나 계열사 동아유리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중독자였던 회장이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는 외엔 할일이 없던 동아유리 대표직은 결국 30년간 몸담았던 동아제약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코리아나의 시작, 그리고 윤석금 회장과의 만남

유상옥 회장은 동아제약을 떠나면서 화장품 사업을 구상했다. 이미 동아제약 시절에 CEO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라미화장품의 대표이사로 있을 당시 세계유수 회사들과 기술제휴를 성사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프랑스의 화장품회사 이브로쉐와의 만남을 통해 관심을 얻게 되고 끈질긴 설득 끝에 계약을 성사시킨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본 조달이 문제였다. 자본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어느 회장은 한국인간개발연구원을 통해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을 만난다.

만남에서 유상옥 회장은 회장과 경영에 대한 이상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과 화장품 유통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의기투합해 투자계약서를 작성하고 윤석금 회장은 경영전반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회장에게 위임하는 지원에 나선다.

결국 회장은 다른 도전에 나서 1989 53세의 나이에 자본금 1억원으로 코리아나를 창업, 3 경영인생을 시작했다. 원래 세계제일의 국산화장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수입품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근교에 벽제공장을 세워 생산에 돌입, 비교적 생산이 용이한 샴푸와 린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브로쉐와 기술제휴를 통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 단계적으로 모든 품목을 자체생산하기에 이른다.

창업주 유상옥 회장이행복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기업철학을 가지고 설립한 코리아나화장품은 창업 5 만에 업계 3위에 오르며 초고속 성장을 이뤄나간다.

창업 10년만에 코스닥 진출

최초 1억원의 자본금으로 출발한 회사는 사업 해인 1989 매출액 14억원을 시작으로 1990 53억원, 1991 250억원, 1992 530억원, 그리고 창업 5년째가 되는 1993년엔 1340억원을 달성, 놀라운 신장율로 화장품업계 3위를 기록했다.

1999 128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며 화장품 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여러 성공 요인 , 기존의 판매 시스템 대신 현금주의, 정찰제를 확립한직판제도 도입으로 타회사와 판매방법을 차별화한 것이 주요했다.

사업국을 중심으로 직판을 확대했으며 직원 교육과 상품차별화에 특별히 주력했다. 또한 화장품질을 높이기 위해 연구개발에 힘을 쏟아 우수한 기초화장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콜마와 기술제휴를 통해 남성전용 제품을 비롯한 뛰어난 제품을 속속 출시,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특히, 1993머드팩 출시, 화장품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는데, 당시 탤런트였던 채시라가 몸에 진흙을 바르고진흙이 미인을 만들어요라는 카피를 내보낸 광고를 계기로 코리아나는 창업 5년만에 창업 원년대비 100배의 매출신장을 이루며 업계 3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한다.

시련은 성공의 디딤돌로재도약 다짐

순탄한 항로만 지속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초 카드대란이 발생했을 즈음 뼈를 깎는 아픔도 있었다.신용카드 남발로 인한 소비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2002 하반기의 실적의 하락 추세는 경영진의 예상보다 급격했다. 결국 코리아나화장품은 2003 1 결국 예산편성 지침과 투자예산 지침을 전면 개편한다.

이는 회사의 이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력?판매?생산?자금 등의 부문별 역량을 적절히 투입하고, 활동 방향에 대한 목표치를 설정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시무식에서는 2004년을새로운 도전의 설정하고 브랜드력과 조직력 강화, 책임경영체제 확립의 경영방침을 제시했지만 시장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2 결산법인의 거래소 상장사와 코스닥 등록업체 9개사 대부분이 2004 상반기에 하락세를 면치 못했던 시기였다. 코리아나 역시 영업이익과 순이익에서 다시 적자를 기록하고, 연말 결산에서도 2 연속 적자를 보였다. 아울러 2000년대 초반 저가 브랜드숍이 잇따라 선보이면서 국내외 브랜드들과 저가 화장품 공세 속에서 매출액이 폭으로 감소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때 3000억원대 매출을 올렸던 코리아나는 매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 고전을 겪는다.

하지만 지난해 흑자로 전환한 코리아나화장품은 올해 경영지표를일어서기 정했다. 마케팅조직을 재정비하는 한편 낡은 이미지를 벗기 위해 스타급 브랜드 론칭도 준비하고 있다.